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야자키 츠토무 (문단 편집) == 생애 == >'''"소녀들의 몸을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사체는 썩어버려도 비디오는 다시 볼 수 있지."''' [[일본]] [[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츠카이치정(現 [[아키루노시]])에 지역 신문사를 운영하는 [[금수저|유복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여동생 2명으로 7명의 대가족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촌(村)회 의원, 조부는 정(町)회 의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그 지역의 명사였다고 한다. 미야자키 가문은 대대로 직조공장을 운영하다가 아버지 대인 1957년부터 주간 발행(발행일은 일요일이었다) 신문사를 시작하였는데, 2차 대전이 끝난 후 양잠업이 쇠퇴하여 경영이 악화되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미야자키의 아버지가 지역정보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신문 발행을 떠올렸다고 한다. [[무가지]]였기 때문에 광고 수입만으로 회사를 유지했으며 인쇄소에 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 나중에 인쇄기를 들였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광고 모집 영업, 할머니는 광고료 수납, 아버지가 취재와 편집, 어머니가 인쇄를 맡는 [[가내수공업]] 수준이었다. 본래 신문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전문 기자였던 초등학교 동창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의 동생인 사카모토 테이지 도쿄신문 기자가 취직 전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출생 당시 [[미숙아]]였고 손에 기형이 있어 손바닥을 뒤집지 못하는 장애가 있었다. 정확한 병명은 양측 선천성 요척골 유합증(両側先天性橈尺骨癒合症). 이 질환은 당시 일본에 150명 정도밖에 사례가 없는 드문 질환으로, 팔목과 팔꿈치를 잇는 2개의 뼈의 일부 또는 전체가 붙어 있어서 손바닥이 하늘을 바라보도록 회전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희귀한 질환이다.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손등으로 세수를 할 수밖에 없기도 하며,[* 그러나 연행되는 도중 촬영된 사진 상으로는 손등으로 세수하는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증상이기 때문에 수술로 뼈를 강제로 분리시켜도 곧 조직이 재생된다. 정도가 심하지 않은 이상 물리치료만 하고 수술은 권장하지 않는 것이 중론. [[징병검사]]에서도 정도에 따라 보충역, 제2국민역 판정을 주는 질환이기도 하다. 부모는 맞벌이를 하느라 분주한 탓에 태어난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였던 그는 쭉 남성 베이비시터와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집안의 엄격한 분위기로 인해 권위적이었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그의 할아버지 뿐이었다. 금수저 집안에서 자란 만큼 학창시절 스펙도 상당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천재 혹은 박사라고 불릴 정도로 공부에 열중하여 우등한 성적을 거뒀고, 중학교 시절에는 [[쇼기]]부에 소속되어 쇼기를 배우면서 다양한 공략책으로 팁을 얻으면서 처음에 졌던 상대에게 이길 때까지 도전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집에서 편도로 2시간이나 걸리는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고교 졸업 후에는 도쿄공예 [[단기대학|단기대]]에 진학했다. 또한 퍼즐에도 관심을 두면서 자작 퍼즐을 전문지에 투고하거나 퍼즐 회답자로 잡지에 자신의 이름이 올려질 정도로 높은 성과를 뒀다. 후술할 열악한 가정환경과 대인관계와 선천적으로 손을 뒤집지 못하는 장애에 비하면 저 정도의 우등한 스펙을 가진 것이 기적일 정도다. 반면 [[대인관계]]는 가족관계와 더불어 그야말로 '''막장''' 그 자체였다. 앞서 말한 손의 장애가 있었던 만큼 학창시절 [[집단괴롭힘]]을 당했다. 한 동급생의 언급에 의하면 그는 상당히 어둡고 타인들 눈밖에 난 소년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학창시절 은테 안경을 쓴 무시무시한 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유는 츠토무를 괴롭히던 동급생들이 그에게 벌레를 던지자 츠토무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소름돋게 씨익 웃으며 벌레를 손으로 짓눌려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인은 메이지대학으로 추천 입학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고교시절에 계속 성적이 떨어져서 그 희망은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단기대학에 재학하면서 학업을 거치던 와중에도 좋아하던 동급생에게 고백했으나 손을 뒤집지 못하는 장애로 인해 거절당했다고 한다. 당시 대학 동급생이었던 카와사키 마요(川﨑麻世)[* 일본의 중견 배우 겸 가수. 2015년에는 [[박상철]]의 무조건을 일본어로 리메이크하여 불렀다.[[https://www.youtube.com/watch?v=iGCOKXNQZPk|#]]]가 훗날 미야자키가 체포된 후 인터뷰에서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으로, 80명 정도의 적은 학급이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만(기억나지 않았고), 친구에게 물어봐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라고 할 만큼 존재감이 희박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숙부의 소개로 코다이라시의 인쇄 회사에 취직해서 인쇄기 오퍼레이터로 근무했지만, 한 동료의 증언에 의하면 근무 자세와 평판이 상당히 엉망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대인관계는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고, 결국 1986년 3월에 해고당하고 자택에 머문다. 부모가 가업을 도우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 했지만, 자기 방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수개월 동안 계속한다. 당시 츠토무는 심한 스트레스성 [[이명]]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하며 이후 9월 경부터 광고 원고를 받으러 가는 정도의 간단한 심부름으로 가업을 돕는다. 이 무렵부터 애니메이션 동인지를 발행하고, 수많은 비디오 서클에 가입해서 전국 각지의 회원이 녹화한 애니메이션이나 특촬(특수촬영) 프로그램의 비디오를 더빙하고 교환하고 그것을 모은다. 그러나 녹화한 테이프는 자신이 직접 보지 않고 오히려 다른 회원에게 지속적인 녹화와 더빙 주문을 했기 때문에 결국 동료들로부터 심한 질책과 미움을 받으며 겨우 1회만에 발행이 끝나버린다. 아마 집안의 엄격한 분위기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은 [[오타쿠]] 활동을 공개적으로 하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만큼 미숙해서 잘못된 소통 방식을 고칠 기회가 없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남에게만 취미 분야의 제작을 맡긴 것은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는 실책이었다. 이후 방황하다 우연히 만난 어떤 어린 소녀가 그를 위로해 주었는데, 이 때부터 [[페도필리아|유소녀에 대한 집착을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부모의 잦은 불화와 갈등, 선천적 장애로 인한 이지메, 그에 따른 사회부적응까지 더해 그는 완전히 맛이 가기 시작하여, 이는 '''후술할 최악의 사태로 벌어지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